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후 호이파나라씨 (문단 편집) == 계후라는 자리 == 지금까지 청나라 황제들 중에서 [[옹정제]]를 제외하고 모두 조강지처가 죽은 후 계후를 세웠다. 계후가 죽으면 두 번째 계후를 세우기도 하였다. [[순치제]], [[강희제]]가 모두 그랬다. 보통 조강지처들은 [[황후]]라는 자리의 압박감과 외척세력 때문에 황제로부터 존중은 받았어도 큰 사랑은 받지 못했다. 그런데 [[건륭제]]의 [[효현순황후]]는 이례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지극하게 받았고 황후로서의 입지가 탄탄했기 때문에 계후의 자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. [[효현순황후]]가 육궁을 통솔할 때에는 효현순황후보다 잘난 가문의 후궁이 없었고[* 효현순황후는 부찰씨로, 만주 양3기 중에서도 으뜸인 양황기 소속이었는데 다른 후궁중에선 고귀비와 한비를 제외하곤 만주 귀족조차 없었으며 고귀비는 막 대기된 집안에, 한비는 하5기 출신이라 부찰황후보다 현저히 격이 떨어졌다.],사랑받는 적자를 두 명이나 낳았으며, 후궁들의 품계가 막 귀비로 올라간 상황이라서 적수가 없었다. 그러니 계황후가 황후로서 살아가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. 건륭제가 존중은 해줬지만,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면서, 계황후가 황후가 되고 다음해, 건륭제는 효현순황후에게 바치는 시에 "어찌 새 금이 끝내 미치지 못하는가. 옛 검을 구해 서로 오래도록 맞네(豈必新琴終不及,究輸舊劍久相投)"[* 효현순황후가 서거한 후 삼 년이 되어 쓴 시다.]라며 효현순황후를 추켜올리고 계황후를 까내리는 표현을 썼다.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조강지처인 효현순황후와 비교되는것은 어쩔 수 없는 서러움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